심리학과 종교에 대한 융의 사상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가 다만 정신과 의사에 그치지 않았고 현대를 참으로 깊이 있게 살았던 사상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인류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게 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사는지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살펴보려고 했다.
그것은 그가 집단무의식에 대해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집단무의식 속에는 태곳적부터 살았던 인류의 삶 전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현대인에게 구루나 현자같이 다가올 수 있다. 그런 그가 현대인에거 전하려는 메시지은 무었일까? 그것은 아마 지금 인류에게 시급한 문제는 그림자의 통합이며, 그것은 사람들이 내면에 있는 신성을 의식화할 때 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자가 통합되지 않을 때 인간의 삶에는 커다란 파괴가 자행될 터인데, 인류는 여태까지 내면에 있는 신성을 의식화하면서 정신적 발달을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심리학과 종교] 는 분석심리 학자 융이 1937년 미국 예일대학의 테리 강좌에 초청을 받고 강연한 내용들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때 융은 심리학과 종교, 특히 그의 전문 분야인 의학 심리학과 종교에 관해서 강연하면서, 종교와 심리학은 종교에 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평소 생각하던 종교관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진술하였다.
그는 강연의 제1부에서는 종교는 인간 영혼의 가장 보편적인 표명으로서 무의식의 자율적 기능에서 나온 본성적인 것이라고 하였고, 제2부에서는 종교의 도그마는 무의식의 깊은 층에서 신성력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 체험을 상직적인 방식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으며, 제 3부에서는 종교적 상징은 것이 만들어진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현재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삼위일체 신은 현대인이 무의식에서 요청하는 신의 이미지를 반영하지 못하여 현대인은 고통받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 사회의 정신적 혼란의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현대인은 지금 겉으로는 아무리 종교 집회에 참석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신과 관계를 맺지 못하여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의 개인적인 삶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그는 정신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가 세속적 유대주의의 바탕에서 신을 환상에 불과한 존재로 보았던 것과 달리, 루터교 목사였던 그의 아버지와 유럽사회의 기독교 문화 때문에 신적 현상의 실재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계몽주의 이래 서구사회에서도 종교성에 많은 변화가 생기는 것을 목도하였고, 그에 따라서 그전까지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중심적 가치가 사라져서 고통당하는 현대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융은 자서전에서 현대 세속 도시 빈에서 자란 프로이트와 달리 역사적인 것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바젤에서 자란 영향때문에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목사인 아버지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떠날 수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성장 후 기독교에 실망하였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의학수업 이외에 종교사학파의 저작들은 물론 리츨 등 현대 신학자들이 쓴 신학서적도 많이 읽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인간의 정신과 종교 현상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고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융이 정신과 의사가 된 다음 언제부터 다시 종교현상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가 1911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 연금술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그가 프로이트와 헤어지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1912)에도 영지주의 문헌들을 인용한 것을 볼때 그는 계속해서 인간의 정신적 발달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프로이트와 결별한 이후에도 적극적 상상을 통하여 성서적 인물들과 대화하였고 1916년에는 영지주의적 신관을 피력한 [죽은자들을 위한 일곱 편의 설교]를 썼다. 그 후 인간의 종교체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종교심리학 분야를 연구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프로이트와 달리 종교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종교적 관심은 동양종교에까지 이어져서 1920년경부터 도덕경과 주역 등을 읽었으며, 1926년에 인도학자인 하인리히 짐머가 저술한 [인도의 제식상에 표현된 예술형태와 요가]을 읽었고, 1930년대 초에 그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38년 인도 정부의 초청으로 콜카타대학 창립 2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길에 종교가 인간의 정신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연히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35년 [티베트 사자의 서]에 관한 심리학적 주석을 썼고, 1939년 선불교학자인 스즈키가 쓴 [대해탈]의 서문을 쓰면서 동서양의 종교성 사이에 있는 비슷한 점과 다른 점에 대해서 피력하였다. 그러는 한편 1932년 쿤달리니 요가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요가의 명상과 수행훈련이 정신치료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다른 종교의 수행방법 또한 용어와 수행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의식과 접촉함으로써 인격의 변환을 추구하는 수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종교의 수행법들은 모두 그가 정신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주장한 개성화 과정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수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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