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 이차적인 중개에 의해 진행되는 이러한 수업을 통해서 여러분은 자신만의 판단을 내리기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조건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때 문제의 관건은 상당 부분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그 증인을 여러분이 얼마만큼 신뢰하는지의 여부에 좌우된다.
정신분석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기는 첫 번째 어려움은
정신분석가는 적어도 그 스스로가 참가해서 하나의 역할을 했던 그런 사태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을 배울 수 있는 통로는 존재한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인격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정신분석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자기 관찰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당한 표현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른다 해도 상관없다. 정신적인 현상 중에는 매우 평법하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현상들이 매우 많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술을 몇 가지 습득하고 나면 그 현상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때 여러분은 정신분석이 묘사하고 있는 그 과정의 실재성과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확신을 얻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방법으로 달성하는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숙련된 전문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분석하게 하면 훌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의 효과를 스스로 체험하고 다른 사람이 정신분석 요법의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다루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 방법은 한 개인을 상대로 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결코 수강생 전체를 대상으로 수행 될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기는 두 번째 어려움은
정신분석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기는 두 번째 어려움은, 더 이상 정신분석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 적어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의학 공부를 해왔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은 여러분의 사고 활동을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여러분은 신체 기관의 기능과 장애들을 해부학적으로 철저하게 규명하고 화학적,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생물학적으로 파악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 그러나 여러분의 관심 중에서 어느 한 부분도 이처럼 놀랍도록 복잡한 신체 기능 발달의 정점에 놓여 있는 인간의 심리 활동으로 향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심리학적 사고법이 낯설기만 하고, 여러분은 그런 것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에 학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들을 문외한들이나 시인들, 자연 철학자들, 신비주의자들에게 내맡겨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는 여러분의 의료적 활동의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러하듯이, 환자는 여러분에게 처음에는 자신의 정신 과정의 표면만을 내보이게 되며, 여러분은 그 한계의 대가로 여러분이 이룩하고자 노력하는 치료적 영향의 일부를 그렇게도 경멸해 마지않는 엉터리 의사나 자연 요법가, 또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내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아 왔던 교육은 여러분의 의학적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철학적 보조 학문이 결여되어 있다. 사변 철학도 기술 심리학도, 또 감각 생리학과 연결된 이른바 실험 심리학이라는 것도, 학교에서 배우는 형태 그대로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거나 심리적 기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장애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주지 못한다.
정신분석은 정신 의학이 결여하고 있는 심리학적 토대를 제공하려고 하며, 육체적인 장애가 정신적인 장애와 함께 나타나는 이유를 밝힐 수 있는 공통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신분석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기는 다음 어려움은
정신분석은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두 가지 원칙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지적인 편견과 충돌하고, 또 다른 하나는 심미적, 도덕적 편견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위력적인 것들로서 인간에게 유익하고도 필연적인 인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견들은 정서적인 힘들에 의해서 고착된 것이기 때문에 이들과 싸우는 것은 아주 힘겨울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반갑지 않은 주장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제기되는 것은, 정신적 과정들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와는 달리 심리적인것과 의식적인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우리는 의식을 바로 그 심리적인 것을 결정하는 특성으로, 심리학을 의식의 내용에 관한 학문으로 여겨 왔던 것이다. 그렇다. 두 개를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이와 같은 입장은 너무도 자명한 것으로 보였고, 그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명명백백한 망상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신분석은 의식과 정신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정신을 감정, 사고, 의지와 같은 과정으로 정의하며, 무의식적인 사고나 무의식적인 의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냉정한 과학성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호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정신분석은 어둠 속에서 집을 짓고 흐린 물속에서 낚시를 하려는 공상적인 신비론일 뿐이라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을 설정함으로써, 이 세상과 학문의 세계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방향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
정신분석이 그 연구 결과의 하나로 공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명제는, 좁은 의미에서나 넓은 의미에서 성적인 것으로 지칭할 수 있는 본능 충동이 신경증이나 정신 질환을 불러 일으키는 데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와 같은 성적인 충동은 또 인간 정신 가운데 최고의 문화·예술·사회적 창작 활동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정신분석 연구의 이러한 결과에 대한 혐오감이야말로 정신분석이 부딪치고 있는 저항감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가? 우리는 문화란 생존을 위한 역경이라는 추진력 밑에서 본능 충동을 희생함으로써 창조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문화는 인간 사회 속에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개개인들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본능 충족의 희생을 되풀이함으로써 항상 새롭게 다시 창조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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