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융은 인간 정신의 병적인 상태를 각 종교에서 말하는 죄(또는 악)에 사로잡힌 상태로, 치유 과정을 깨딸음을 통해서 해방되는 과정과 유사하게 보았고, 그때 신적 원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하였다.
융에게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자기, 인간은 자아, 신과 인간의 관계는 자기와 자아의 관계로 대치시킬 수 있다.
인간이 욕심 때문에 신을 떠나 죄를 짓고 죄에 사로잡힌 결과 고통당하는 것은, 자아가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만 몰두하다가 무의식의 기반에서 벗어나 일방성에 빠지고 그 결과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
그 같은 구조는 치료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종교에서는 죄에 빠진 인간이 회개하여 다시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분석심리학에서는 정신적인 문제에 봉착한 사람이 여태까지 잘못된 생활 태도를 가지고 살았음을 자각하고, 무의식에 들어가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무의식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 치유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때 우리 -안에 있는-신인 자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자기는 환자들이 깊은 병중에 있었을 때에도 작용하고 있었으며, 치유과정에서도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아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고 치료는 자기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융의 심리학은 종교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융에게 그의 신관에 대해서 종종 물어보았는데, 그는 두가지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하나는 퀴스나하트에 있는 융 연구소 현관 위에 써 붙인 "우리가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거기 계시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1959년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먼저 그가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거기 계시다" 라는 델피의 신탁을 써 붙인 것은 그가 신은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그의 생각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는 신은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인간의 삶에 강력한 작용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의 작용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은 그 체험을 하기 전과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그의 강력함과 온전함 때문에 인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활동한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융은 그런 신적 작용은 물론 사람들이 어떤 것을 신적인 것으로 체험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물론 그에게 찾아오는 많은 환자의 삶에서 긍정적인 방식이든 부정적인 방식이든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명백한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을 때는 굳이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신은 기독교나 불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특정 종교의 신은 아니었고, 유신론적인 신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생각 할 수 있는 신론을 모두 초월하는 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신을 단지 인간의 심리적 작용에 의한 것으로만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왜나하면 그는 신의 작용을 원형적인 것의 출현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융에게서 원형은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체험 될 수 있는 정신양이다. 정신적이지만 실체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 정신양은 ... 목표지향적이며 기억력에 따르고, 생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추신경의 기능을 포함한 모든 신체적 기능의 합이다." 그러므로 융은 인간의 신체험은 단지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실제적인 체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의 영역은 인간을 무한히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것인지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바울의 말대로 나중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아야 명확하게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융의 사상은 그가 유럽의 기독교문화권 속에서, 더구나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의 가정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지만,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의식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인류의 모색과도 관계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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