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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기독교

바울의 복음에 대한 분석

by 라라필링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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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다.

 

레온 모리스 박사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 서신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 로마서는 하나님에 대한 책이다. 다른 어떤 주제도 하나님이라는 주제처럼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없다. 바울은 이 서신서에서 다루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킨다. 성경의 어떤 다른 책도 그와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그것은 사도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하고 맡기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도 모든 진정한 복음 전도의 근저에 놓여 있는,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확신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은 잡다한 인간의 사색도, 다른 종교들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종교도 아니다. 사실상 전혀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 잃어버려진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복음 전도는 그 내용과 목적과 추진력을 상실한다.

 

복음을 증거해 주는 것은 성경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절)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계시해 주셨지만,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그들에게 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약속해 주셨다. 사실상 구약과 신약에는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다. 예수님은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점, 자신이 다니엘 7장에 나온 인자이며 이사야 53장에 나온 고난받는 종이라는 점, 그리고 기록된 대로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과 높이우심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과 관련해서 구약을 인용하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바울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강론하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하신다는 것과, 그 그리스도가 곧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은 '성경대로' 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율법도 선지자도 복음에 대해서 증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라는 이중적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며, 바울 역시 이어서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2절의 삽입구를 빼내고 1절과 3절을 연결시키면 바울은 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진술이 남게 된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의 아들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된 소식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루터가 이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말하듯이, '여기에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문이 활짝 열린다. 즉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칼빈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쓴다.  '복음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한발자국이라도 이동한다면 그것은 복음으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제 대조되는 두 구절로 그 분을 묘사한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4절). 여기에는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다윗의 혈통에서 나심)과 죽으심(그의 부활에 전제되어 있는),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심 그리고 통치하심(다윗의 보좌)이 언급되어 있다. 이 대구법은 매우 솜씨 있고 주의 깊게 구성된 것이엇,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초창기에 만들어진 신조의 일부를 인용한다고 추측해 왔다. 만일 그렇다면, 이제 그는 사도의 권위로 그 신조를 승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칭호(다윗의 씨와 하나님의 아들), 두 개의 동사(그 분이 다윗의 혈통이 '되었지만' 혹은 '나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 혹은 '임명되셨다'는 것), 그리고 두 개의 한정절[육신을 따라와 성결의 영을 따라]을 대조시킨다.

 

먼저, 두개의 칭호를 살펴보자. '다윗의 아들'이란 보편적으로 인정된 메시아의 칭호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특별히 시편 2:7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그 칭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이해하셨는가 - 그 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친숙하게 접근하신 것과, 자신을 단호하게 '아들'이라고 칭하신 데서 나타나듯이- 를 보면, 이미 그 칭호가 단순히 메시아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 칭호를 분명히 그같이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두개의 칭호는 서로 결합해서 그 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말해 준다.

 

두 개의 동사 중 첫 번째 동사는 거의 문제가 없다. 그것은 단지 '되었다'는 뜻일 뿐이지만, 분명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다윗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러나 두 번째 동사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는 번역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호리조'가 사실상 '인정한다'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을 제대로 번역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의 심판자로 '정하신' 경우와 같이, '정하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 시에 혹은 부활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졌거나 확증되었거나 임명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 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이로 해서 사람들은 '능력으로'라는 말을 동사 '인정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사에 연결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런 경우 바울은, 예수님이 '권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진 분' 이라고 , 심지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고 단언한다. 니그렌은 다음과 같이 씀으로써 그러한 대조를 잘 파악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의 실존에서 전환점이다. 부활 이전에 그 분은 연약하고 낮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부활을 통해 그 분은 권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세 번째 대조는 '육신을 따라'와 '성결의 영을 따라'라는 두 개의 수식절이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분명 예수님의 인간적 본성 혹은 육체적 혈통을 말한다. 그 말은 아마도 그 분의 부활과 신성에 암시되어 있는 능력과 대비해서, 육신의 연약함 혹은 취약성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그 두 문구를 좀더 뚜렷하게 대비시키기 위해, '성결의 영을 따라'를 '그의 신적 본성을 따라' 혹은 적어도 '그의 거룩한 인간 영을 따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결의 영이란 분명하게 예수님의 신적 성품을 가리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게다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시거나 부활에 의해 권능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은, 그 분의 어떤 일부분- 그 분의 신적 성품이건 그 분의 인간적 영이건-만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육체와 영이시며, 인간적이고 신적인 예수 그리스도 전체였다.

 

또 어떤 주석가들은 '성결의 영'이 성령을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히브리어 표현이며, 성령과 부활에는 명백한 연관들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성령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시며, 또한 -더 중요한 것으로-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보이시고 그럼으로써 성령의 시대인 새 시대를 여신 분은 바로 부활하시고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육신을 따라'와 '성령을 따라' 라는 두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역의 두 단계, 곧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사역을 말하는 듯하다. 부활 이전의 사역은 연약한 것이었으며, 부활 이후의 사역은 쏟아 부어진 성령을 통한 능력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 아들의 비하와 승귀, 그의 연약함과 능력, 다윗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분의 인간적 혈통, 부활에 의해 또 성령을 주신 것에 의해 확립된 그 분의 권능에 찬 신적 아들 됨 등에 대한 균형 잡힌 진술이 나와 있다. 게다가 이 유일 무이하신 분, 다윗의 씨이며 하나님의 아들, 연약하며 능력 있으신 분, 성육신하시고 높이 올리우신 분은, 바로 우리 삶을 소유하시고 통치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마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두 가지 칭호인 '그리스도'와 '주'라는 말은,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각각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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