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말하기에 대해서는 언어학자나 정신의학자들에게서보다는 시인들에게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들이 시적 표현의 방법으로 잘못 말하기나 그 밖의 실수들을 사용해 온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이 그 실수들과 잘못 말하기를 무언가 의미심장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어쩌다가 잘못 쓴 것을 작품 속의 인물이 그대로 잘못 말하게 놔두었을 리는 없다. 잘못 말하기를 통해서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알게 하려 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가 혹시 우리에게 그 관련 인물이 정신이 없거나 피로한 상태이거나 혹은 그에게 편두통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후에 가서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잘못 말하기가 작가에 의해서 의미심장한 것으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물론 그것을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실제로는 의미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리적 우연에 지나지 않거나 아니면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함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권리는 시인이 가지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오토 랑크는 잘못 말하기의 예를 발견했다. 그것은 베니스 상인에서 행운의 여인이 세 개의 상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 유명한 장면에서 나온다. <발렌슈타인>에서의 말실수,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 에서의 잘못 말하기 등 시적으로 섬세하고 의도된 연출로 훌륭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작가가 이러한 잘못 말하기의 메커니즘을 잘 알고 썼으며 청중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치가 넘치는 리히텐베르크라는 풍자 작가에 대해서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농담을 할 때는 그 속에 항상 문제가 감추어 있다." 실제로 농담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머러스하고도 풍자적인 메모>에서 리히텐베르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만일(angenommen)이라고 읽는 대신에 아가멤논(Agamemnon)이라고 읽곤 했다. 그만큼 그는 호메로스의 책을 많이 읽고 있던 것이다. 이 내용 자체가 잘못 읽기의 이론인 것이다.
잘못에 대한 시인들의 견해와 우리의 견해가 일치하는 지 알아보자. 우리는 실수 행위를 의도된 기능과 관련지어 볼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통찰에 도달했다. 또 실수행위는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지닌 것 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그러므로 만일 실수행위가 좀 더 넓은 범주에서 확인된다면, 실수 행위가 발생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러한 의미 자체가 더욱 흥미진진한 것이 되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의미>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어떠한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에 쓰여지는 의도와 심리적인 맥락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 이외의 다른 뜻은 없다. 우리 연구의 많은 부분에서 <의미>라는 단어는 <의도> 또는 <경향>으로 바꾸어 써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실수> 속에서 어떤 의도를 발견 해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거나 실수를 시적으로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에만 머물면서 그러한 종류의 매우 많은 관찰 사례를 보도록 하자. 그러면 그 의도, 즉 잘못 말하기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경우들의 전체 범주를 발견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정반대의 말이 의도한 말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 국회 의장이 개회사를 하면서 "국회가 폐회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의미는 또렸하다. 그렇게 잘못 말하게 된 의도는, 국회 의장이 그 회의를 폐회시켜 버리고 싶었다는 데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그가 한 말 그 자체로만 판단하게 된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우선 우리가 실수를 그 자체로서만 판단하기로 동의했던 사실을 망각하는 행위다. 실수 행위 때문에 방해 받은 의도와 실수 행위의 관계는 추후에 다시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영어에서 <begging the question>이라고 일 컫는 것처럼 논의되고 있는 문제를 요술처럼 사라져 버리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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